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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공시각 : 04/08 18:59 출처 : 한겨레21
제목 : [지구촌] 한 인본주의자의 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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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을 일삼은 한 인본주의자.’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최근 영국 지성계는 이 같은 모순된 표현을 놓고 한동안 설전을 주고받았다. 문제의 주인공은 <한낮의 어둠>(Darkness at Noon)으로 유명한 작가 아서 케슬러(1905∼83)와 영국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질 크레이기. 질 크레이기는 대처 총리시절 노동당 당수를 지낸 진보정객 마이클 푸트의 부인이라서 더욱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여자들이 알랑거려서?
케슬러는 사건의 내용만큼이나 이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 소련, 스페인 내전을 오가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한때는 공산당원이었을 정도로 열렬한 좌익인사였다. 프랑스에서 나치에 체포됐다가 1940년 영국으로 망명한 뒤스탈린의 숙청을 소재로 한 <한낮의 어둠>으로 좌파독재의 실상을 고발했다. 이만한 전설적 인물에 대한 사후 평가가 본격적으로시작된 것은 지난해 아서 케슬러의 평전이 발간되면서부터였다.
데이비드 세자라니가 <아서 케슬러: 떠도는 영혼>을 내놓으면서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해 크레이기가 케슬러로부터 강간당한 사건을 소상하게 밝혀놓은 것이다. 1951년의 일로 수십년 전 일이지만최초로 공개된 내용이었다. 이 책은 그간 위대하게만 보이던 케슬러의 명성을 한순간 무너뜨리게 할 만큼 그의 평생을 낱낱이 해부해놓았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쓰인 이 평전은 케슬러의 애독자들로부터도 잘 쓴 전기라는 평을 들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전혀 엉뚱하게 논쟁으로 끌고 나간 인물이 등장했다. 작가이며 비평가인 프레드릭 라파엘은 케슬러의 둘도 없는 추종자. 그의 해석은 이렇다. “위대한 인물을 그런 사소한 사건 따위로 해석해선 안 된다. 위대한 작가는 작품만으로 평가돼야 한다.” 여기까지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한술 더 떴다. “질 크레이기나 작가인 제인 하워드나 모두 당시에사회적으로 출세해보려던 여자들 아니었느냐? 케슬러의 유명세를빌려 덕을 보려고 그 앞에서 알랑거렸던 것 자체가 발단이 된 게아니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처녀도 아니면서 그 정도도 몰랐겠느냐?”며 단정적으로 크레이기의 강간을 왜곡해석했다.
케슬러는 영국으로 건너와 문학, 예술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뒤 영국 지성계 인물들에게 상당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이번 세기 가장 위대한 정치문학작품으로 꼽히기도 하는 <한낮의 어둠>이 던진 충격은 좌우를 막론하고 아주 대단했다. 정치를 하면서도 평소 문단인물들과 교유해온 마이클 푸트가 케슬러와 친분을 가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따라서 푸트의 부인인 크레이기에게 케슬러가 남편의 가까운 친구로 보였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위대한 작가를 작품으로만 이해하든, 인간성으로 이해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남성에게 강간당한 여성의 고통이 미화
될 수 있거나 그 사실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수전 그리핀의 말대로 강간은 남성위주 사회가 여성 전
체에 가하는 집단적 테러리즘의 환경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
이다.
런던=권은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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